어떡하지 어떡하지 병을 가진 J

미래를 계획하는 것과 걱정하는 것의 미묘한 차이

어떡하지 어떡하지 병을 가진 J
Photo by Nik / Unsplash

이 글은 지난 2022년 12월 9일에 작성한 글을 옮긴 글입니다.


나의 MBTI는 ENFJ다. 내 성격을 잠깐이라도 크게 바꿀만한 외부적 충격을 겪은 뒤 바로 테스트를 보지 않는 이상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거의 10년 동안 모든 성향이 뚜렷한 ENFJ이다. 오늘은 그중에서 J와 관련된 나의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해본다.

자세히 알려줄 수는 없지만 이번 한 주의 스케줄이다.

마냥 행복하게 살던 ENFP에서 시간을 쪼개 쓰는 ENFJ로

나는 원래 어렸을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는 ENFP였다. 그때까지는 스케줄링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냥 일어나서 학교 가고, 수업 끝나면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농구를 했다. 그리고 PC방에 가고 싶으면 PC방에 가고, 간식을 먹으면서 TV를 보고 싶으면 TV를 봤다. 그리고 잤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자마자 미국 유학을 결정하게 돼서 미국으로 떠났다. 영어를 하나도 못했고, 친구도 없는 상황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그냥 이대로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반 친구들은 30분이면 끝내는 숙제를 나는 2시간 넘게 해야 겨우 쫓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짧은 하루를 살았고, 그래서 그 시간을 잘 써야 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조금씩 오늘 하루 나한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 어떻게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다 하면서 동시에 내가 하고 싶은 일들도 할 수 있는지, 그러면서 최소한의 수면 시간도 확보할 수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지금은 오늘 하루, 이번 주를 넘어 이번 분기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늘 고민하고 계획하는 슈퍼 J가 되었다. 구글 캘린더, 노션, 스프레드시트 등의 툴을 열심히 활용하고 있다.

계획하는 삶의 장점과 단점

이렇게 미래를 늘 계획하다 보면 확실한 장점도 있고 단점도 존재한다.

계획하는 삶의 장점

  • 모두에게 24시간이 주어지지만 더 많은 것을 하고, 경험하고, 성취하고, 배울 수 있다.
  • 벼락치기할 필요도 없고 당연히 기한보다 일 처리가 늦지 않는다.
  • 내가 늦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않을 수 있다.
  • 내가 속한 여러 조직/공동체에서 계획적인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
  • 자신 있게 일을 벌릴 수 있다.
  •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캘린더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에 내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다.
  • 그래서 지난날들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시간들이 많았는지 알 수 있다.

계획하는 삶의 단점

  •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으면 쉽게 짜증 나거나 화가 난다.
  • 내 옆에 '계획'과 거리가 먼 사람들은 나의 존재를 피곤해한다.
  • 일 처리가 느리거나 기한을 넘는 사람들 때문에 늘 짜증이 나있거나 화가 나있다.
  • 너무 시간을 빡빡하게 써서 늘 바쁘고 여유가 없다.
  • 계획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불필요한 고민과 걱정하는데 에너지를 빼앗긴다.

슈퍼 J의 삶을 산지도 벌써 어느새 거의 15년이 다 되어 간다. 그렇기 때문에 단점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잘 보완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 특히 잘 안 되는 것이 있다. 단점 중에 가장 마지막에 써놓은 불필요한 고민과 걱정하는데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이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병

원래는 훨씬 담대하고 도전적이고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지 않고 나는 일을 벌리고 돌격대장처럼 뛰어다녔던 편이다. 계획적인 성향과 돌격대장의 성향이 어떻게 같이 존재할 수 있는지 의아해 할 수 있는데, 나 나름대로는 내 계획 안에서 돌격하는 거였다.

내가 하기로 한 일, 해야 할 일들에 있어서는 거침없이 일을 벌리고, 진행했다.

아마도 결혼을 준비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더 이상 내가 무턱대고 돌진했다가 나만 고생하는 인생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인지 고민과 걱정이 많아졌다.

이러면 어떡하지? 저러면 어떡하지?

조금씩 고민하고 걱정하던 게 습관이 돼서 이제는 병이 됐다. 일을 하다가, 밥을 먹다가, 예배를 드리다가도 계속해서 "이러면 어떡하지, 저러면 어떡하지" 하면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에 일에 대해서 고민하고 걱정하게 된다.

맨날 아내한테도 하는 이야기가 어떡하지 이야기이다.

미래를 계획하는 것과 걱정하는 것의 미묘하지만 큰 차이

미래를 계획하는 것과 걱정하는 것은 아주 작은 차이지만 매우 다르다. 나에게 있어 원래 미래를 계획한다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 나에게 주어진 많은 것들을 감사하며 잘 누리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조금 부족하거나 문제가 있는 것들도 미래에는 분명 좋은 방향으로 잘 해결될 거라는 소망이 넘치는 시간을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새 그런 마음으로 계획하는 게 아닌 지금 내가 좋아하고 감사한 것들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고 행복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으로 가득 찬 시간이 됐다. 그래서 오늘 하루를, 내일 하루를 더 열심히 살아서 그런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막아야 하는 필사적인 시간이 됐다.

근데, 지금 문제없잖아? 그럼 됐잖아!

최근에 집에 내가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과 사모님이 집에 놀러 오셨다. 맛있는 것을 먹고 이러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요즘 고민과 걱정이 많다는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그 이야기를 듣고 사모님이 웃으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우리 집에도 아이들이 읽는 책이 있어요.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떤 아이가 나와서 '이따가 배가 고프면 어떡하지. 먹을 것이 없으면 어떡하지. 먹을 것이 있어도 맛이 없으면 어떡하지. 급하게 먹다가 체하면 어떡하지.' 하면서 계속 고민하고 걱정을 해요. 그러다가 마지막에 다른 친구가 이렇게 이야기해요. '근데, 지금 너 배 안 고프잖아. 그리고 집에 가면 먹을 것도 있잖아. 그럼 문제없잖아. 그럼 됐잖아!' 그러니까 너무 고민하고 걱정하지 말아요.

(물론 정확히 내용은 기억은 안 나는데 대충 책의 내용이 이랬다.)

그때는 사실 그냥 웃고 넘어갔는데 그 이후에 고민하고 걱정할 때마다 사모님이 해주신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글을 쓰게 됐는데, 쓰다 보니 좀 더 생각이 잘 정리된 것 같다.

2022년이 벌써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 잘 남은 시간은 좀 더 감사한 마음으로 주어진 하루하루에 집중해보고 싶다. 그렇다고 계획은 안 하지는 않을 거다. 대신 계획할 때, 원래 그랬던 것처럼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주어진 것들 즐겁게 누릴 수 있도록, 그리고 나를 고민하고 걱정하게 하는 많은 문제들도 잘 해결될 거라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계획할 수 있으면 좋겠다.


혹시라도 저처럼 고민하고 걱정하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빼앗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러지 말고 오늘 하루에 충실하게 살면서, 오늘 주어진 감사한 것들을 누리는 하루를 보내면 어떨까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니까 갑자기 영화 '어바웃 타임'이 생각이 나기도 하네요. 아내랑 한 번 올해가 끝내기 전에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