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에 대해 (부제: 육아는 아이들을 기다려주는 것)

둘째 딸이 태어나고 육아휴직을 하면서 '잘' 기다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나는 그게 왜 어려운지 돌아봅니다.

기다림에 대해 (부제: 육아는 아이들을 기다려주는 것)

지난 토요일에 둘째 딸이 태어났다. 이제 딸 둘 아빠가 됐다. 그래서 잠시 육아 휴직을 하면서 가족들, 특히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기다림에 대해 돌아본다.

나는 진짜 급하다

나는 성격이 정말 급하고, 가장 못하는 것 중 하나가 기다리는 것이다.

아내가 지금도 기다리지 못해서 답답해하거나 혼자 화가 나있는 나를 보면서 어이없어하기도 하고 웃겨하기도 한다.

물론 내가 급하고 잘못 기다린다고 해서 생각이 짧거나, 계획 없이 본능에 충실하며 사는 스타일은 절대 아니다.

급한 만큼 많은 깊은 생각을 빨리 한다

나는 MBTI가 극단적인 ENFJ이며, 그중에서도 J 성향은 매우 짙게 드러나는 편이다. 아주 사소한 것까지 미리 생각하고 계획하며, 플랜 A, B뿐만 아니라 C, D까지 생각하는 편이다.

만약 내가 계획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내가 이미 한참 전에 그 순간에는 계획적으로 움직이지 않기로 미리 정했거나, 아니면 내가 정말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성격은 급한데 계획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 발생하거나,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한다면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기도하고, 찾아보고, 여러 사람들과 빠르게 의견을 주고 받으며 결정을 내린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오전에 이야기했는데 오후에 결정을 했기 때문에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나는 그 시간에 후회되지 않을 만큼 충분히 많은 생각과 고민, 대화 등을 하고 온 것이다.

이런 성향은 내가 계속 스타트업, 그 중에서도 특히 초기 스타트업에서 계속 일하는 배경 때문에 더 짙어지고 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좋은 결정은 빠른 결정과 실행인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 기다린 것

내 인생에서 내가 압도적으로 가장 오래 기다린 것이 있다면 아내와 결혼하는 것이다.

사귄지 100일만에 프로포즈를 했다. 그것도 심지어 둘 다 대학교 4학년이 시작된지 한 달이 된 시점이었고, 둘 다 미국에서 학생 비자로 있었기 때문에 졸업 후 미래가 정말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재밌는 건 이 프로포즈도 사실 나름 기다리고 한 거였다. 사귀자고 고백할 때부터 결혼할 생각이 있었고 한달이 지나면서 확신이 들었지만, 그때 당시 내가 있던 청년부 담당 목사님께서 제발 조금만 기다렸다가 하자고 해서 100일까지 기다렸다 했다.

아내는 이 사실에 정말 어이없어 한다.

중간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기다리는 것이 너무 힘들고 답답했던 순간도 많았지만 아내랑 결혼하고 같이 가정을 이루고 싶어서 견뎠다.

결국 프로포즈한지 3년만에 결혼하게 됐다.

그래서 아내한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지금도 내가 3년을 참고 기다린 것은 그만큼 내가 아내를 많이 사랑한다는 증거라고 하기도 한다. 아내도 결혼하고 보니 원래도 성격 급하고 못 기다리는 건 알았지만 이정도일줄 몰랐고, 그걸 감안하면 아내도 인정한다.

내가 번아웃에 빠지는 유일한 상황: 기다려야할 때

나는 체력과 멘탈이 강한 편이라서 일반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상황도 오랫동안 잘 견딘다. 여러가지 일이 쏟아지고, 잠을 많이 자지 못하고, 프레셔가 강한 상황이더라도 잘 버틴다.

에너지 레벨이 높고 잘 유지되는 편이라서 오랜 시간 계속해서 쏟아낸다고 해서 번아웃이 오지 않는다.

하지만 번아웃이 오는 유일한 상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기다리는 것일 때이다.

예를 들어 2021년에 결혼하고 미국에 와서 예상과 다르게 비자가 빨리 해결되지 않고, 언제 해결될지 기약 없이 백수 상태로 기다려야 했을 때가 내 인생에 손에 꼽는 번아웃, 또는 우울감이 컸던 시기였다.

또 다른 시기는 첫째 아이 출산 직전 한 달 동안, 아이를 낳고 나서의 상황이 어떨지 모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계획할 수 없고 그냥 애가 태어난 뒤 상황을 지켜보기 까지 기다려야 했던 상황이다. 성격상 몇 달 뒤까지 여러 스케줄과 계획으로 가득 채워놓는 편인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상황이 너무 고통스럽고 우울했다.

육아는 잘 기다려주는 것

이제 딸 둘 아빠가 되면서 많이 느끼는 것은 육아는 잘 기다려주는 것이다. 아이들을 잘 기다려주기만 해도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첫째가 최근 두살이 됐고, 그러면서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것, 그걸 하고 싶은 타이밍, 하고 싶은 방식 등 의견이 아주 강해졌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때 나를 닮아서 굉장히 빠르게 화가 나고 짜증 나고, 한번 화가 나면 더 이상 어떤 이유로 화가 났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속상해 한다. 마음을 풀어주려면 아이가 실제로 잘못을 했든 안 했든 상관없이 먼저 속상하고 화가 났다는 감정에 공감해준 뒤, 진정이 되면 대화를 해야 한다.

아마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렇겠지만, 아이가 어떤 것을 하려고 할 때 더 좋은 방법이 있거나 순서가 있다면 그걸 가르쳐주고 그대로 하게 하려는 순간들이 많다.

당연히 자기가 직접 해보는게 중요한 우리 딸은 내 의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방해하는 게 되니 짜증이 나고 화를 낸다. 아이 입장에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못하게 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아이가 하고 싶은 걸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아이를 다치게 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또는 둘 중의 하나의 상황이 미래에 발생하게 될 가능성을 높이게 하는 습관을 형성하게 하는 것만 아니라면 그냥 둬도 큰 문제는 없다.

오히려 그냥 두는게 아이 발달에도 좋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해보고 싶은걸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해보면서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며칠처 전 발생한 사건

둘째를 낳고 막 집에 돌아와서 보내는 첫 날 저녁이었다. 저녁 식사 후 이 닦고 씻고 책 읽다가 자야하는데, 아내는 손목이나 허리 등에 무리가 가면 안되기 때문에 내 담당이었다.

근데 첫째 딸은 자기 동생도 보고 싶고 엄마도 보고 싶고 하고 싶은게 많았다. 그러다보니 해야 할 것들이 많은데 전혀 진행이 되지 않고 시간만 흘렀다. 성격이 급한 나는 참다가 더 이상 못 기다려주겠어서 그냥 억지로 이빨 닦고 샤워시키고 방으로 데려가려 했다.

화가난 아이는 엉엉 울기 시작했고, 완전 뒤집어져서 소리지르고 주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기저귀도 안 하겠다고 도망다니다가 바닥에 쉬해서 다시 샤워하고 바닥을 닦아야 했던 나도 짜증이 더 났다.

소리지르면서 엉엉 울고 있는 애를 억지로 눕혀서 기저귀 채우려고 했는데, 아이가 너무 흥분했는지 숨도 가빠지고 얼굴이 눈물과 콧물, 침 범벅이 돼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당황해서 억지로 기저귀 채우는 것을 멈추고 아이가 진정할 때까지 한참을 기다리다가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안아주고 마무리했다.

그 뒤로 며칠 내내 (지금도 계속) 그 상황이 생각이 나면서 아이한테 너무 미안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게 진행됐다고 해도 아마 30분정도에서 길어야 1시간 정도 아낄 수 있었을 거다. 하루 24시간에 절대적인 시간으로 보면 그리 많은 시간이 아닌데, 그걸 기다려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물론 해야할 게 너무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은 내 입장에서는 30분, 1시간이 정말 너무 귀하기도 하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아무리 답답하고 짜증도 나고 화가 나더라도 정말 최선을 다해 참으면서 기다리려고 한다. 이 글을 쓰는 오늘 저녁에도 기다리려고 노력하다가 너무 답답하고 화가나서 혼자 벽에 박치기를 하기도 했다.

육아도 그렇고 결국 좋은 리더, 멘토는 건 '잘' 기다려주는 것

좋은 리더의 여러 덕목이 있겠지만, '잘' 기다려주는 것이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냥 기다린다고 좋은 것은 아니고, '잘' 기다려주는게 중요하다.

'잘' 기다린다는 것

  • 의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것
  • 충분히 혼자 시도하고 실패를 겪어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충분한 가이드를 주는 것
  •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잘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래서 '잘' 기다려주면 처음에는 엄청 느리다고 느낄 수 있지만, 결국 이게 훨씬 더 빠른 방법이기도 하다.

지금의 나는 결국 누군가 나를 '잘' 기다려주었기 때문이다

  1. 진짜 고집 세고, 자기 멋대로이며, 지금 돌아보면 폐륜아스러웠던 순간도 너무 많은 나를 버리지 않고 잘 참고 기다려주신 부모님
  2. 아무리 노력하고 연습해도 연습 경기에서 조차 좋은 경기력이 나오지 않던 나를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주신 초등학교 ~ 중학교 농구 코치님
  3. 간절하지 않고 자기관리가 부족했던 막내 팀원이 이후 주장이 되기까지 성장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신 고등학교 농구 감독님
  4. 처음 하나님을 만나 은혜라는 개념이 없던 율법주의 초신자가 은혜를 경험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신 군대에서 만난 내 인생의 첫 목사님
  5. 자존감이 낮아 수많은 가면을 쓰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며 살고 있던 내가 예수님 앞에서 무장해제 되기까지를 기다려주셨던 대학부 담당 목사님
  6. '나 자신'을 페이스북 종교관으로 둘만큼 내 인생에 대한 주인의식이 강했던 내가 오직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주님 (My Lord)라고 고백할 때까지 기다려주신 하나님
  7. 나를 위한 좋은 말이어도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듣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아내님...ㅋㅋ

보너스: 추가로 나를 닮아 잘 참지 못하는데 아빠가 잠깐 기다리라고 하면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인상쓰고 기다리고 있는 딸래미

요즘 세상에서 기다린다는 것

요즘 AI로 인해 정말 모든 것들이 빨라졌다. 나는 특히 테크, 스타트업 업계에 있고, AI 제품을 만드는 초기 팀에서 세일즈, GTM을 하다보니 이걸 더 빨리 많이 체감하고 있다.

AI 시대 전에는 몇시간, 몇일, 몇주가 걸리던 일도 이제는 정말 빨리할 수 있게 됐다. 결과물을 보기까지의 시간이 훨씬 짧아졌고, 그로 인해 의사 결정도 빨라졌다.

나 자신만 보더라도 이전에는 구글에서 검색해서 여러 블로그, 뉴스 등으로 찾아보며 정보를 수집하고,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소화하고, 고민한 뒤 의사결정을 내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지금은 Perplexity, ChatGPT 등을 활용해서 정말 빨리 정보를 찾고 흡수하고 소화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됐다.

실행의 속도가 결국 능력이 되고, 성과가 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세상에서 살다보니, 그리고 안 그래도 급하고 기다리지 못하던 내가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어렵게 느껴진다.

아마 내 성격이 쉽게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노력하고 싶은 건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나를 기다려준 감사한 사람들을 생각해서 나도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잘' 기다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