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꿈을 꾸게 됐을까? #3
4년간의 대학 입시, 그리고 또 다른 실패
*이 글은 2021년 1월 7일에 작성한 글을 옮긴 것입니다.
미국 대학 입시를 한국 대학 입시와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우선 내가 한국 대학 입시를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고, 그 방법이나 환경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감히 이야기해보자면, 미국 대학 입시도 참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 대학 입시와의 직접적인 비교 및 거론은 설명한 이유로 더 하지 않겠다.)
뉴저지에서 펜실베니아로 고등학교 전학을 갈 때 나는 한 학년을 꿇었다. 지금 생각하면 굳이 그랬어야 했나 싶기도 하지만 그런 결정은 철저히 대학 입시의 경쟁력을 위해서였다. 영어를 하나도 하지 못했던, 그래서 시행착오를 겪었던 미국 1년 차. 그리고 전학을 가면서 새로운 출발을 할 겸, 한 학년을 낮춰서 학교 성적 및 대학 입시 준비를 더 잘하기 위함이었다. 참고로 미국은 고등학교가 9학년부터 12학년까지 총 4년이다. 그래서 난 고등학교를 5년을 다녔다.
미국 유학에는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어간다. 모든 유학생이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비용이 고스란히 부담으로 다가왔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농구에 재능이 없어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유학길에 올랐다. 그렇기에 공부는 잘해야 했다. 공부도 못하면... 나는 왜 존재해야 할까 싶었다. 그런데 나 한 명 유학하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마침 집에 여러 안 좋은 일들이 겹치면서 유학을 하자마자 집안 사정이 많이 어려워졌다. 그만큼 부담은 커졌다.
잘해야 해. 무조건 잘해야 해. 내 존재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꼭 증명해야 해.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노력했던 만큼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미국 고등학교는 자신의 진로 방향에 따라 어떤 클래스를, 어떤 난이도로 들을지 정할 수 있다. 나는 늘 가장 어려운 클래스, 심지어는 한 학년 더 높은 수업을 (물론 난 한 학년 꿇었으니 쌤쌤이긴하다) 들었다. 그리고 해당 학년에서 할 수 있었던 리더십 포지션 (기숙사 반장, 선도부(?), 외국인 학생회 멘토 등), 그리고 축구와 농구는 학교 대표팀 선수로 뛰었다. 미국 대학 입시 시험이었던 SAT, SAT2 성적도 최고급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점수도 받아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부담감은 더 커졌다. 그 학교에는 한국 학생들이 꽤 많았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서로의 수준, 현재 상태, 좋은 대학으로 진학할 가능성, 실제로 어느 대학에 붙었는지에 대한 뒷이야기 등 참 많았다. 특히 입시 부담이 가장 컸던 11학년 2학기, 12학년 1학기 때는 잠을 3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았다. 학교 성적도, 내가 하고 있던 다양한 대외활동들, 그리고 입시 준비까지 다 잘 하기 위해서는 잠을 6시간, 8시간씩 자면서는 불가능했다.
그만큼 나는 절실했다. 내가 무언가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고, 그래서 나는 존재할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면서 혼자서 많이 울었다. 너무 힘들었다. 너무 많은 우여곡절도 있었다. 꿈 따위는 없었다. 물론 건축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미대 준비를 했던 시간도 있고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고 잘했기 때문에 산업공학 같은 공대생이 되는 것도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도 결국에는 꿈이 아닌 '성공'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나보다 압도적으로 잘하는 다른 학생들을 보며 포기했다.
12학년 3월 4월 정도가 되면 지원했던 대학 결과들이 나온다. 좋은 성적과 대외 활동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도, 부모님도, 입시를 도와줬던 학원 선생님들도 나는 상위권 대학교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은 엄청난 교만이 되었다. 나는 20군데가 넘게 지원했던 거의 대부분의 대학교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때 경험했던 또 한 번의 '거절감'은 글을 쓰는 지금도 살짝 눈물이 고이게 한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나의 삶의 터전이 바뀌게 됐다. 펜실베니아에서 매사추세츠 보스턴으로. 그나마 나를 뽑아줬던 대학교로 가게 됐다.
To be continued...